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탈문의 변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영종의 복위 조서를 비롯하여 명나라가 탈문의 변 이후 조선에 전달한 각종 조칙의 내용이 [[세조실록]]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.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ga_10306003_002|#]] 복위 당시 경태 연호를 즉시 천순 연호로 고친 사실과, 폐태자 견심을 다시 황태자에 책봉하면서 태상황 시기에 태어난 영종의 세 황자들을 포함한[* 영종의 차남 견린은 토목의 변 이전에 태어났고, 5남 견주부터 7남 견준까지는 태상황 시기에 태어났다.(3, 4남은 요절) 영종의 8, 9남은 복위 후에 태어났다. 한편 성화제의 휘는 견심(見深)이나 초명은 견유(見濡)였기에 태자 책봉 조서에는 이름이 이 초명으로 나온다.] 4명의 황자를 동시에 [[친왕]]으로 책봉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. 특이한 점으로는 영종의 5남 견주(見澍)의 이름이 견전(見湔)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,[* 오류가 분명하다. 명실록에 실린 같은 조서에는 이름이 [[위키백과]]나 [[바이두백과]]에 제시된 이름인 見澍로 제대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.] 이는 실록 편찬이나 인쇄를 할 때 [[필사]]나 [[식자]] 작업이 잘못되어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. 그 외의 황자들은 모두 본명을 정확히 기록했다. 한편, 탈문의 변으로 영종의 복위가 선포된 6월 3일 이후 조선은 '''[[단종복위운동]]의 마지막 불씨를 꺼버린다.''' 태상황이 제위를 먹튀한 동생을 내쫓고 황제위를 되찾았다는 소식에 세조의 친위세력 사이에는 점차 불안감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. 결국 때맞춰 그 달 하순경에 [[금성대군]]의 역모에 대한 고변이 들려오고, 몇달 지나지 않아 [[양녕대군]], [[효령대군]] 등의 종실 어른들이 나서서 단종과 금성대군, [[한남군]], [[화의군]], [[정종(부마)|영양위 정종]] 등의 단종 지지세력에 대한 처벌 상소를 시작한다. 결국 그 해, 금성대군과 단종은 모두 사사당한다. [각주] [[분류:쿠데타 ]][[분류:명나라]][[분류:중국사/변고]][[분류:15세기 사건 사고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